박은식
국내인물교육가/인문학자인문학자
출생1859년09월03일
사망1925년11월01일
출생지황해도 황주
인물소개
민족사학자이자 언론인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2 3대 대통령을 지냄. 화해도에서 가난한 농촌 서당훈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 호는 겸곡.백암. 필명으로 무치행, 태백광노라 함으로써 나라 잃은 백성으로서의 부끄러움을 자조적으로 표현하였다. 박은식의 생애는 제1기(1859~1897): 주자학을 수학하고 그 가치관에 의 해 위정척사 사상을 지녔던 시기, 제2기 (1898~1909): 언론활동 등을 통해 민중계몽과 개화자강 사상을 지녔던 시기, 제3기 (1910~1925): 망명 이후 독립운동과 역사연구에 업적을 남긴 시기로 나눌 수 있다. 박은식은 언론인으로서, 구국계몽운동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서 활약하였고, 경학원 강사와 한성사범학교 교사(1900), 오성학교와 서북협성학교 교장(1909)을 역임하는 등 교육자로서도 활동하였다. 이를 전후하여 '겸곡문고'(1901) 등 수편을 저술하고, 수십 편의 논설을 발표하였으며 많은 번역서를 '대한매일신보'에 게재하였다. 그러나 한일합방 후 중국으로 망명한다. 박은식은 그 무렵 역사 연구를 통해 1911년에 '동명왕실기', '발해태조건국지', '몽배금태조', '명림답부전', '천개소문전', '대동고대사론' 등을 잇달아 저술, 간행하엿으며, 1915년에는 '한국통사'를 펴냈다.중국에서 독립운동에 힘쓰던 박은식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후원하는 한편, 1920년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저술, 간행하였다. 이는 '한국통사와 함께 그의 대표 저작으로 꼽히는 것으로, 1884년의 갑신정변부터 1920년의 독립군 무장투쟁까지의 피어린 독립운동사를 서술한 것이다. 그러던 1924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에 추대되었다. 그러나 지병인 기관지염의 악화로 1925년 11월 1일, 독립쟁취를 호소하는 유촉을 남긴 채 서거하였다. 그의 유해는 상해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68년만인 1993년 8월 5일 봉환되어 국립묘지에 안장됨으로써, 고국에서 영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