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보문고
  1. 인물&작품
  2. 메인

한현순Haley Hyon-sun Fenwick

수필가
공유하기 아이콘공유하기 아이콘

인물소개

1947년 7월, 충북 옥천군 군북면 지오리에서 청주 한씨(한귀섭)와 재령 이씨(이계녀)의 셋째 고명딸로 태어나 부모님의 품에 안겨 서울로 올라와 동대문구 망우동(지금은 서울 중랑구 망우동)에서 유아기를 보냈다. 아기였을 때 영양실조로 눈에 미영시(무명씨)가 끼어서 치료는 엄두도 못 낼 당시 외할머니가 닭 한 마리를 고아서 그녀를 무릎 위에 앉히고 숟갈로 국물을 떠먹였던 정성으로 미영씨 낀 그녀의 눈과 영양실조의 몸은 기적적으로 소생해 재롱둥이 고명딸로 성장했다. 일곱 살 때인 1953년 4월, 서울 동대문국민학교에 입학해 국민학교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열세 살 때인 1959년, 경기여자중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했으나 면접시험에서 집안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낙방해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한 채 국민학교 졸업 직후부터 5개 외국어를 구사해야겠다는 꿈을 키우며 AFKN 미 8군 방송을 들으며 영어부터 독학의 길로 들어섰다. 열여섯 살 때인 1962년, 신설동 타자학원에 급사로 취업해, 열아홉 살 때인 1966년, 평택 캠프 험프리스 타자원 겸 여비서 공모에 응시해 타자실기 시험과 영어면접 시험에 합격했으나 발령을 받지 못하고 기다리다 그해 8월 캠프 험프리스 장교클럽 식당여종업원인 ‘웨이트리스’로 두 번째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1966년 9월, 세 번째 직장인 캠프 험프리스 장교클럽 여비서로 발탁되어 18개월 동안 〈열심, 우의, 정직〉으로 부여된 임무를 충실히 수행한 공로로 1969년 1월 캠프 험프리스 장교클럽 최고 우두머리인 제너럴 매니저 〈감사장〉을 받으며 Grade 7로 승진되어 대한민국 국민 평균 월급보다 12배의 급료를 받으며 행복한 직장생활을 했다. 24세 때인 1971년 5월, 서울 조계사 부근 시외버스터미널에서 한국 주재 뉴질랜드 〈한뉴목장 농업 컨설턴트〉로 재직하던 뉴질랜드 청년을 버스 안에서 우연히 만나, 지정된 좌석 때문에 평택까지 같이 앉아가게 되고, 얼마 후 뉴질랜드 청년의 구애와 청혼으로 7개월 후인 1971년 12월, 한국 주재 뉴질랜드 대사관의 주선으로 국제결혼 후 남편을 따라 1972년 2월 19일 한국을 떠나 뉴질랜드로 이민을 갔다. 1981년 7월, 중국 정부를 위해서 뉴질랜드식 아웃도어 파밍(Outdoor Farming : 옥외농장)을 셋업(Setup : 설립) 하려고 남편과 세 아들을 데리고 중국 광시성 치안지앙시범목장에서 1년, 산시성 친슈이시범목장에서 2년, 3년간 중국에서 살면서 중국어와 중국 현지 생활을 체득하고 1984년 10월 뉴질랜드로 돌아와, 1986년 4월부터 그동안 결혼생활로 단절되었던 사회생활을 복원하기 위해 직업소개소를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1988년 8월 8일, 일본 정부는 해마다 전 세계에서 일본어를 공부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일본어 능력 시험을 치르며, 최고 점수를 받은 학생들에게 비행기 삯, 숙식비, 용돈까지 현찰로 주며 일본을 구경시켜 주는 국위선양 행사를 열었는데, 그녀는 뉴질랜드 웰링턴 대표로 뽑혀 전 세계에서 모여든 93명의 〈일본어 장학생〉들과 함께 일본의 유명 도시를 여행하며 일본어와 일본문화를 습득하기도 했다. 그녀의 나이 43세 때인 1990년, 세 아들들을 대학까지 공부시키기 위해 〈5개년 재무계획표〉를 작성한 후 솔로 맘으로 뉴질랜드 사회 직업전선으로 나아가 타국 사회에서의 숱한 고난과 역경을 이기며 동양 여성으로는 최초로 일곱 번째 직장인 종신생명보험 판매 회사 파이낸셜 어드바이즈(재정고문 또는 재정구원)로 활동하며 〈뉴질랜드 전역 TOP 10 브로커〉 반열에 올라 4년간 〈백만 달러 원탁회의〉에 초빙되었다. 그러던 중 1992년 6월 2일, 본의 아니게 종신보험회사 한 클라이언트의 집 한 채를 인수, 세입자 관리를 해 주며 부동산 사업에 첫발을 내디딘 후 한 해에 한 채씩 부동산을 사들였고, 어떤 해는 두 채도 사들이고, 얼마 후는 웰링턴 지역을 넘어서 뉴질랜드 남섬의 부동산도 사들이며 〈집 한 채는 나무 한 그루〉라는 개념으로 부(富)의 문을 열어갔다. 이 기간(2015∼2020) 동안 뉴질랜드 언론들은 그녀를 “부동산 투자 전문가”, “모기지 설계의 마술사”, “자산 증식의 파트너”, “웰링턴 부동산 투자 멘토” 등으로 소개했고, 그녀는 한국 교민은 물론 뉴질랜드 본토민들로부터도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43세 때인 1993년 3월 대전 EXPO’93 〈뉴질랜드관〉 관리자로 한국에 파견되었다. 1993년 12월, 뉴질랜드 육류수출위원회 한국어 통역사로 발탁되어, 한국 미트 바이어들의 육류 수입 상담을 한국어로 통역하며 뉴질랜드 전역 모든 도축장을 바이어들에게 안내하며 함께 동행했다. 48세 때인 1995년 5월, 종신보험 판매 프리랜서로 전향하다. 50세 때인 1997년 뉴질랜드 전역 Top 10 브로커가 되어 무려 4년간 계속되다. 54세 때인 2001년 밀리언 달러 라운드 테이블(Million Dollar Round Table : 백만 달러 원탁회의)에 초빙되어 캐나다를 여행하고 돌아온 이후 2020년까지 그녀를 찾는 수많은 뉴질랜드 전역 클라이언트들의 모기지(mortgage) 대출상담, 재무 설계, 은퇴 전략, 그리고 특히 부동산 투자(Property Investment) 관련 컨설팅을 해주며 갖은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오뚜기처럼 우뚝 서는 한국인의 참모습을 오늘날까지 보여주며, 전 세계인들로부터 귀감이 되는 〈한국여성상〉을 이룩하였다는 정평을 받고 있다.

0

판매순

등록된 상품이 없습니다.

한현순 | 수필가 - 교보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