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반 일리치Ivan Illich
국외인물사회학자정치/사회사상가
출생1926년
사망2002년12월02일
출생지오스트리아
인물소개
저자 만큼 논쟁적이며 수많은 수식어가 따라붙는 이 시대의 사상가도 드물다. "가장 급진적 사상가"(TIME)이자 "위대한 사상가"(가디언)였고, 주류 체제를 떨게 하는 "지식의 저격수"(뉴욕타임스)였다. 12개 국어에 능통하고, 화학과 신학, 역사를 전공했으며 그가 현대 사상에 끼친 영향은 사회학, 철학, 신학, 역사학, 과학기술을 넘나든다. 하지만 그는 어떤 범주와 분류에도 넣을 수 없는 사상가이다. 이반 일리치는 1926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중부 유럽을 떠돌다가 나치 박해를 피해 이탈리아로 피신한 후, 화학·신학·역사학 분야에서 학위를 받았다. 1951년 로마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교황청 국제부직이 예정되었으나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빈민가의 보좌신부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았다. 1956년 서른 살에 푸에르토리코 가톨릭 대학교의 부총장이 되었다. 1966년 멕시코에 '문화교류문헌자료센터CIDOC'를 설립해 당시 전 세계가 숭배하던 개발 이념에 도전했다. 이 센터는 급진 운동의 근거지이자 사상의 싱크탱크가 되었다. 교회에 대한 비판으로 교황청과 마찰을 빚다가 1969년 스스로 사제직을 버렸다. 1971년 '학교 없는 사회'를 발표한 후, '공생을 위한 도구', '의학의 한계' 등으로 현대 문명에 근원적 도전을 던지며 세계적 사상가가 되었다. 1980년대에는 현대 관념의 뿌리를 밝히기 위해 12세기로 거슬러 오르는 사상적 여정을 시작해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텍스트의 포도밭에서' 등을 출간했다. 사회학·철학·경제학·여성학·종교학·언어학 등 여러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기며, 가장 근원적이기에 가장 급진적인 사상가로 평가 받는다. 말년에는 한쪽 뺨에 자라는 혹으로 고통 받았지만 현대식 의료 진단과 치료를 거부했다. 2002년 12월 2일 독일 브레멘에서 눈을 감았다. 보수주의자에게는 '사상의 저격수'로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진보주의자에게는 시대를 앞선 성찰로 불편함의 대상이었던 이반 일리치. 21세기 인간 해방의 길은 이반 일리치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학력
- 화학·신학·역사학 분야 박사학위
경력
- 1951로마에서 사제서품 받음
- 1956푸에르토리코 가톨릭 대학교 부총장
- 1966멕시코에 '문화교류문헌자료센터CIDOC' 설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