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로슬라프 하셰크Jaroslav Hašek
국외인물문학가고전문학가
출생1883년
사망1923년
출생지체코
인물소개
체코의 작가이자 언론인, 출판인이다. 일생 동안 약 1,500편에 달하는 작품을 집필했으며, 특히 대표작《훌륭한 병사 슈베이크》는 전 세계 60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1883년 4월 30일,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현 체코공화국 프라하의 슈콜스카가에서 요세프 하셰크와 카테르지나 햐슈코바 사이에 태어났다. 요세프와 카테르지나 사이에는 야로슬라프보다 먼저 태어난 아들이 있었으나 두 사람의 장남이었던 요세프는 생후 1년이 지나 사망했고 그 후 야로슬라프가 둘째 아이로 태어났다. 아버지 요세프 하셰크는 중등학교 수학 교사로, 나중에 슬라비아은행의 보험 회계를 담당하기도 하였는데 끊임없는 생활고에 시달리던 그는 차츰 술에 의존하게 되었고 급기야 야로슬라프가 열세 살이 되던 해 세상을 떠났다. 그 후 하셰크의 가족은 극심한 빈곤에 시달렸다. 어린 시절 내내 빈번히 이사를 다녀 안정적이지 못한 환경이 점철됐다. 겨우 학업을 마치고 슬라비아은행의 은행원의 자리를 얻었으나 얼마 되지 않아 이 일을 그만두었고 자유로운 보헤미안의 삶에 젖어 들었다. 이후 무정부주의자로서 유럽 전역을 여행했는데 당시 헝가리 제국의 일부였던 슬로바키아, 헝가리와 폴란드, 그리고 발칸반도까지 갔다. 발칸반도에서는 마케도니아 봉기에 합류하기도 했다. 러시아 국경을 넘으려는 시도를 하다가 체포되어 크라쿠프에서는 수감 생활도 했다. 그 후에도 슬로베니아, 빈, 바바리아, 베른, 베네치아까지 여행을 했고 알프스를 넘어 걸어서 고향까지 돌아오는 긴 여정을 이어 나갔다. 그 과정에서 전 세계를 돌아다니다가 만난 여행자들, 부랑자들과 친구가 되기도 했다. 1907년에는 후에 《훌륭한 병사 슈베이크》의 삽화를 그려 필생의 연을 맺는 요세프 라다와 만난다. 신문사 기자 겸 편집자로도 일했다. 1908년부터는 《여성의 지평선》이라는 잡지, 1910년에는 시사 풍자 잡지 《동물의 세계》의 편집자로 일을 하면서 《체코의 소리》, 《체코슬로반》, 《횃불》, 《유머》지 등의 잡지에 글을 기고했다. 이 시기 야르밀라 마예로바라는 여성을 알게 되어 결혼하는 한편 그를 죽음으로 몰아 간 알코올 중독이 시작된다. 삶에서 경험한 다양한 시대상을 작품에서 그려 냈는데 당시 잭 런던이나 막심 고리키의 시대 비평 문학들과 견줄 수 있을 만한 것들이었다. 작품에 객관적 고고학, 광물학, 지질학, 동물학 등의 백과사전적 사실과 그로부터 영감을 받은 이야기를 풍부하게 녹여 내 당시의 저명 문학 비평가였던 프란티셰크 크레이치(František V. Krejčí, 1867∼1941)는 하셰크의 작품을 두고 “우리 문학사 최초의 ‘과학적’ 문학 작품”이라고 칭할 정도였다. 1911년에는 온건 진보 성향의 정당을 조직해 선거를 통한 개혁을 실천했고 스스로 선거에 입후보하기도 했다. 1차 대전이 발발한 직후인 1915년에 체스키 부데요비체의 91연대에 자원입대해 갈리치아 전선으로 향한다. 본인의 자원입대에 대해서는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동안 그는 행방불명이 된 것으로 추정됐다. 당시 오스트리아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다수의 체코인 병사들이 그랬듯이 그 역시 마찬가지로 1915년 가을에 스스로 전쟁 포로가 되어 압송됐고 그와 함께 포로가 된 체코인 병사들과 함께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에 들어가 활동을 했다. 유고슬라비아를 거쳐 러시아까지 이동했으며 얼마 후인 1918년에는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에서 나와 모스크바에서 체코 사회민주당에 합류하여 코민테른의 지원하에서 러시아 적군에 들어가 복무했다. 러시아 우파(Ufa)에서 군 출판국의 편집장으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대 외국인 협력 부서의 담당자로도 활동했다.1920년 12월 다시 프라하로 돌아와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 그러나 악화된 건강으로 인해 붉은군대가 운영하는 포로수용소 안에 있던 거처를 떠나 리프니체 나트 사자보우로 이주해 작품을 마무리 지으려 했다. 스스로 집필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창가에 놓인 철제 매트리스 위에 누워 조수인 클리멘트 슈테파네크에게 자신의 말을 받아 적게 하여 《훌륭한 병사 슈베이크》의 마지막 장을 완성하려고 애썼다. 그의 삶의 마지막 한 주간은 우울하고 비참했다. 몸은 많이 부어올라 있었으며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했고 걸을 수도 없었다. 슈베이크의 이야기를 말해 주는 것조차 힘든 상태였다. 그렇게 그는 만 40세를 채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죽음 이후에도 평안하지 못했다. 주변에 장례 비용을 부담해 줄 사람이 없어 결국 그의 장례 비용은 빚으로 남았다. 교회로부터도 배척을 당하는 사람이어서 교회의 예법에 의존해야 했던 당시의 장례 절차에서도 문제를 겪었다. 불신자로 취급되어 묘지 내에 묻히는 것도 거부되었으며 결국 자살한 사람들이 묻히는 시체안치소 뒤쪽 그늘진 곳에 묻혀야 한다는 판결을 받았다가 교구 신부의 허락을 간신히 얻어 묘지 담장 안쪽에 묻혔다. 몇 년이 지난 후에야 겨우 상속자들의 기부로 설립된 에두아르트 바세 재단의 후원으로 화강암으로 만든 소박한 비석을 갖춘 묘로 단장됐다.
경력
- 슬라비아은행 은행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