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광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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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소개
(?∼968) 자가 맹문(孟文)이고 자호가 보광자(葆光子)이며 능주(陵州) 귀평[貴平 : 지금의 쓰촨성(四川省) 런서우현(仁壽縣)] 사람이다. 오대 후당(後唐) 때 능주판관(陵州判官)이 되어 명성이 있었다. 후당 명종(明宗) 천성(天成) 연간(926∼930) 초에 강릉(江陵)으로 피난했는데, 이때 고계흥[高季興 : 오대십국 형남(荊南)의 개국 군주]이 형남을 할거하고 사방의 선비를 초빙하자, 손광헌은 양진(梁震)의 천거를 받아 장서기(掌書記)로 들어갔다. 고계흥이 죽고 그의 아들 고종회(高從誨 : 형남의 제2대 군주)가 즉위했을 때 양진이 사직을 청하자, 모든 정사를 손광헌에게 맡겼다. 그 후로 손광헌은 고보융(高保融)·고보욱(高保勗)·고계충(高繼沖)을 차례로 섬기면서 형남절도부사(荊南節度副使)·조의랑(朝議郞)·검교비서소감(檢校秘書少監)·시어사중승(試御史中丞)을 역임했다. 북송 태조(太祖) 건덕(乾德) 원년(963)에 모용연쇠(慕容延釗) 등이 낭주(朗州)의 난을 평정하면서 형남에 길을 빌리고자 했는데, 손광헌이 고계충에게 세 주(州)의 땅을 바치고 송나라에 귀항(歸降)하라고 권했다. 태조는 손광헌의 공을 훌륭히 여겨 그를 황주자사(黄州刺史)에 제수하고 등급을 높여 상을 하사했다. 당시 재상이 손광헌을 학사(學士)로 천거했는데, 미처 그를 불러들이기 전에 건덕 6년(968)에 병사했다. 경사(經史)에 널리 통달하고 특히 학문에 매진했으며, 수천 권의 책을 모아 때때로 스스로 베껴 쓰면서 열심히 교감하는 일을 늙도록 그만두지 않았다. 저술을 좋아해 《북몽쇄언》 외에 《속통력(續通歷)》 10권, 《형대집(荊臺集)》 30권, 《공호편완(鞏湖編玩)》 3권, 《귤재집(橘齋集)》 2권, 《필용집(筆傭集)》 2권, 《잠서(蠶書)》 2권을 지었는데, 《북몽쇄언》만 전하고 나머지는 모두 망실되었다. 손광헌은 또 사(詞)에도 뛰어났는데, 오대 후촉(後蜀)의 조숭조(趙崇祚)가 편찬한 《화간집(花間集)》에 그의 사 61편이 수록되어 있다. 《송사(宋史)》 권483 〈형남고씨세가(荊南高氏世家)〉와 《십국춘추(十國春秋)》 권102에 그의 전(傳)이 있다.